
스타뎀 영화라고 해서 편하게 틀었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멈칫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먹질 대신 화장실 거울 앞에서 구토하는 사내의 뒷모습이었습니다. 2013년작 <허밍버드>(북미 개봉명 <리뎀션(Redemtion)>)는 제이슨 스타뎀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과소평가된 작품인데, 지금 다시 봐도 이 영화만큼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드뭅니다.
액션 느와르와 PTSD 사이에서: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솔직히 처음엔 저도 '스타뎀이니까 중간쯤 되면 화끈하게 터지겠지'라고 생각하며 봤습니다. 런던 뒷골목을 떠돌며 노숙자 이사벨을 구하다 양아치들에게 두들겨 맞는 오프닝부터, 이건 제가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영화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주인공 조이는 한때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특전사 요원이었습니다. 여기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개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조이가 술과 약에 의존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은 단순한 타락이 아니라 이 PTSD의 전형적인 자기 파괴적 회피 행동입니다. 쉽게 말해, 고통을 잊기 위해 더 큰 고통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제가 영화를 보며 가장 불편했던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이렇게 처절하게 무너져 있으면 관객은 어디서 쾌감을 찾아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느와르(Noir)라는 장르적 특성이 여기서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허밍버드>는 이 공식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을 대단히 강하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조이는 화교 조직에 몸담아 불법적인 일을 돕는 동시에, 거기서 번 돈으로 노숙자 쉼터에 어마어마한 양의 피자와 마늘빵을 트럭째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조이 존스가 보냅니다, 그냥 가져다주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이 영화를 단순히 '스타뎀의 액션물'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분류가 꽤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나이트 감독은 <피키 블라인더스>의 각본가 출신으로, 대사 한 줄 한 줄에 계층과 상처를 촘촘하게 새겨 넣는 작가입니다. 그 감독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 영화가 단순한 킬링타임용으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스타뎀 재발견, 그리고 이 영화의 한계
제이슨 스타뎀 하면 대개 수트에 무표정, 압도적인 피지컬로 악당을 정리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트랜스포터>, <분노의 질주>, <비키퍼>까지,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대체로 '건드리면 안 되는 남자'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밍버드>의 조이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헝클어진 장발,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보며 긴 한숨을 내뱉는 눈빛. 이 장면에서 스타뎀이 이렇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였나 싶어 잠시 화면을 멈췄습니다. 기존의 액션 스타 타이틀을 완전히 내려놓은 연기였습니다.
상대역인 수녀 크리스티나를 연기한 아가타 부제크와의 호흡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릴 때 가족과 생이별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크리스티나의 고백 장면은,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건드리는 방식으로 연출되어 차가운 느와르 안에 뜻밖의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수녀와 조이 사이의 로맨스 서사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는데, 솔직히 저도 그 생각에 반쯤은 동의합니다. 속죄와 구원이라는 주제로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필요하지만, 장르적으로는 어색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고 들어온 관객과, 깊이 있는 드라마를 원하는 관객 모두에게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지점입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조이가 남기는 독백은 제가 이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나쁜 놈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올바른 일을 하려 노력했다." 영웅 서사가 아닌, 최소한의 인간적 선을 지키려 발버둥 친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영화 전반에 조이는 온갖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최소한의 기본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 영화의 여운은 대부분의 액션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시원한 해소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바로 이 쓴맛 나는 카타르시스에 가깝습니다.
총평
제이슨 스타뎀의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허밍버드>는 제가 스타뎀 영화 중에서 가장 자주 다시 떠올리는 작품입니다. 화려하게 터지는 장면보다, 다 헝클어진 채 거울을 보던 조이의 눈빛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그의 다른 작품들도 각각 충분히 매력이 있지만, PTSD를 가진 복잡한 내면을 비중 있게 표현한 것은 어쩌면 이 작품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액션 영화들처럼 카타르시스보다는 쓴 여운이 더 길게 남는 결말입니다. 그래서 이 점이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이슨 스타뎀이라는 배우를 액션 장르 바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이 영화가 줍니다.
자극적인 킬링타임 영화에 조금 지쳐 있거나, 묵직하게 가슴을 채워줄 느와르 감성이 필요한 날 밤에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 제목 '허밍버드(벌새)'가 무슨 의미였는지 곱씹어 보시면, 러닝타임 내내 깔려 있던 조이의 처지가 다시 한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영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졸트 (걸크러시-케이트 베킨세일, 분노조절, 액션 밀도, 그리고 아쉬운 점) (0) | 2026.09.07 |
|---|---|
| 영화 <더 리틀 띵스 (The Little Things)> (세 배우, 충격적인 결말, 총평) (0) | 2026.09.07 |
| 대도시의 사랑법 (줄거리와 결말, 원작 소설 vs 영화, 총평) (0) | 2026.09.03 |
| 영화 <플레인> (비상 착륙, 생존 액션, 가스파레) (0) | 2026.09.02 |
| 영화 <더 트립> 리뷰 (살인 리허설, 탈옥수 난입, 블랙 코미디) (0) | 2026.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