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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영화 <더 트립> 리뷰 (살인 리허설, 탈옥수 난입, 블랙 코미디)

by 대장마녀 2026.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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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트립 (2021)

 

서로를 죽이려고 별장에 온 부부가 있는데, 그 별장에 이미 탈옥범 셋이 숨어 있었습니다. 2021년 노르웨이 영화 《더 트립》의 기본 설정입니다. 처음 이 전제를 들었을 때 저는 그냥 웃었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는 웃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영화,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습니다.

살인 리허설 — 서로가 서로를 노리는 부부의 심리전

영화는 남편 라스가 마트에서 망치와 밧줄을 구입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설마 했는데 아내 리사도 따로 준비를 해뒀습니다. 이 구도가 명확해지는 순간부터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라 블랙코미디(Black Comedy), 즉 죽음과 폭력을 웃음의 재료로 삼는 장르적 전략을 본격적으로 가동합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라스가 망치를 들고 침실로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관객은 결말을 예상하지만, 리사가 선수를 쳐버립니다. 이 역전이 폭소를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서늘합니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효과적이었습니다.

라스는 TV 드라마 연출가, 리사는 무명 배우입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죽음을 연출하거나 연기하려 했다는 점에서 직업적 아이러니가 극대화됩니다. 이 설정은 그냥 웃자고 넣은 게 아닙니다. 오랜 결혼 생활 끝에 사랑이 아닌 거액의 생명보험금이 유일한 관계의 이유로 남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직업 설정 하나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생명보험금이 살인의 동기이자 두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근거가 됩니다.

제 경우엔 전반부 30분을 보면서 "어느 쪽이 먼저 성공할까"보다 "어느 쪽이 더 멍청한 실수를 하나"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유도하는 감상법이기도 합니다.

  • 라스: 망치와 무거운 돌을 이용해 아내를 살해 후 호수에 수장하는 계획
  • 리사: 당구공을 양말에 넣어 즉석 무기를 만들고 사냥 사고로 위장하는 계획
  • 두 계획 모두 상대방에게 들통나며 영화 초반부의 핵심 웃음 포인트를 형성
요약: 서로를 제거하려는 부부의 살인 리허설이 맞부딪히는 전반부가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롭고 유쾌한 구간입니다.

 

탈옥수 난입 —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부터

별장에 도착하기 전, 이미 세 명의 남성이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교도소를 탈옥한 전과자 페테르, 로이, 데이브입니다. 부부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락방에서 조용히 버티다가 결국 발각되는 이 장면의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탈옥수 난입이라는 설정, 즉 교도소에서 무단 이탈한 중범죄자가 등장하면 보통 영화는 납치 스릴러나 생존 호러로 선회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탈옥수들이 부부 싸움에 끼어들어 황당해하고, 부부는 탈옥수들이 있어도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비틀기가 영화의 중반부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특히 근육덩어리 로이를 연기한 안드레 에릭센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말수가 적고 폭력적인 인물이지만, 그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묘한 코믹함이 함께 따라옵니다. 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중반부 긴장감이 많이 늘어졌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지점부터 영화의 무게중심이 부부의 내면 갈등에서 서바이벌(Survival), 즉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액션으로 급격히 이동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누가 살아남느냐"의 문제만 남게 되면서, 전반부의 예리한 풍자감이 다소 희석되는 것은 제 경험상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요약: 탈옥수 세 명의 난입으로 판은 완전히 뒤집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심리전보다 생존 액션의 비중이 커지는 점은 호불호를 가릅니다.

 

블랙 코미디의 완성 — 누미 라파스와 악셀 헨리의 연기력

이 영화를 끝까지 붙잡아두는 건 결국 두 주연 배우입니다. 리사 역의 누미 라파스《프로메테우스》(2012) 등으로 세계적 인지도를 얻은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의 연기는 그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유독 자유분방합니다. 냉랭하다가 폭발하고, 살의(殺意)를 감추다가 드러내는 감정의 진폭이 크고 리듬이 빠릅니다. 여기서 리사는 이 감정을 거의 숨기지 않습니다.

악셀 헨리가 연기하는 라스는 반대로 찌질하고 계획적입니다. 망치를 준비해 두고도 정작 결정적 순간에 망설이는 이 인물의 모순이 영화의 블랙유머(Black Humor)를 완성시킵니다. 블랙유머란 죽음, 폭력, 도덕적 타락 같은 어두운 소재를 웃음으로 전환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대사 한 줄 없이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됩니다.

영화 《더 트립》은 스릴러, 코미디, 공포 등 서로 다른 장르의 문법을 하나의 서사 안에 뒤섞는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기법이 성공하면 예측 불가능한 재미를 주지만 실패하면 정체성이 흐릿해지는 위험도 있습니다. 《더 트립》은 전반부에서 이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하지만, 후반부에서는 그 균형이 다소 무너지면서 다소 산만한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웃어야 할지 표정을 찌푸려야 할지 모르는 그 애매한 감각 자체가 이 영화의 정체성이라는 점입니다. 불편함과 웃음이 동시에 오는 장면에서 괜히 혼자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요약: 누미 라파스와 악셀 헨리의 압도적인 연기력이 장르 혼종의 위태로운 균형을 끝까지 붙잡아주는 영화입니다.

 

총평

《더 트립》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 차가 뚜렷한 영화입니다. 부부의 살인 리허설이 맞부딪히는 초반 40분은 제가 최근 본 블랙코미디 중 가장 밀도 높은 구간이었습니다. 반면 탈옥수 난입 이후부터는 서바이벌 액션의 비중이 커지면서 풍자의 예리함이 다소 무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누미 라파스와 악셀 헨리의 연기만으로도 120분이 뚝딱 넘어갑니다. 뻔한 권선징악이 지겹고, 잔인하면서도 어딘가 웃긴 노르웨이산 난장판을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그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두고두고 반복해서 볼 영화는 아니라 하더라도, 본 것을 후회할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한 번쯤 너무 가볍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무섭거나 무겁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면 추천해드리고 싶은 영화입니다.

 

[참고: 더 트립_심층 분석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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