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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영화 <어쩔수가없다> 리뷰 (블랙코미디, 이병헌, 감정선의 이탈, 미장센)

by 대장마녀 2026.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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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2025)

 

이병헌손예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정보 없이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프닝 바베큐 장면에서 이병헌이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순간, 이상하게 불안감이 올라왔습니다. 행복한 장면 뒤에는 꼭 불행이 따라온다는 걸 알고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예상보다 훨씬 깊고 훨씬 씁쓸했습니다.



블랙코미디의 정수, 고추잠자리 시퀀스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서 살인은 대개 복수의 맥락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도덕적으로 찜찜하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구조에 익숙해져 있었죠. 그런데 이번 영화는 다릅니다. 실직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고통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살인이 통쾌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독은 그 자리에 블랙코미디(black comedy), 즉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웃음의 재료로 삼는 서사 기법을 밀어 넣었습니다.

그 정점이 바로 '고추잠자리 시퀀스'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만수(이병헌)와 법모가 목숨을 걸고 대치하는 극단적인 위기 순간에, 박찬욱 감독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대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크게 틀어버립니다. 인물들의 절박한 말은 소리 없이 자막으로만 흘러가고, 화면 위에는 엉뚱한 몸짓만 이어집니다. 관객은 그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을 보면서 웃다가, 문득 이게 누군가의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에 서늘해집니다.

찰리 채플린"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말했는데, 이 시퀀스는 그 명언을 영상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법모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마치 동물 다큐멘터리처럼 한발 물러서 그의 절망을 관찰자 시점으로 포착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서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의 구성이 박찬욱 감독답게 빈틈이 없었습니다.

  • 고추잠자리 시퀀스: 목숨이 오가는 장면에 조용필 음악을 과감하게 배치, 대사를 자막으로만 전달
  • 법모 절망 장면: 동물 다큐멘터리식 관찰자 시점으로 슬픔을 거리감 있게 포착
  • 블랙코미디 문법: 비극과 희극을 같은 장면 안에 병치시키는 연출 전략
요약: 고추잠자리 시퀀스는 박찬욱 표 블랙코미디의 정수로, 비극의 순간을 웃음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씁쓸한 서늘함을 남긴다.

 

이병헌이라는 변수, 연기력이 끌어올린 영화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순전히 이병헌손예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선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이병헌이 만수라는 캐릭터를 소화하는 방식은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캐릭터 자체의 구조는 어렵지 않습니다. 실직한 가장이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설계해 둔 디테일의 밀도는 상당합니다. 만수는 간절하면서 비겁하고, 웃기면서도 처량합니다. 오프닝에서 가족을 껴안으며 행복에 취해 있는 모습과, 살인을 계획하며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 그리고 대놓고 코미디를 요구하는 장면까지 — 이 모든 결을 이병헌은 몸을 아끼지 않고 구현했습니다. 배우 이병헌처럼 넓은 감정 스펙트럼을 한 인물 안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배우는 많지 않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라마틱한 폭발 없이도 캐릭터의 무게를 끝까지 유지했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색채와 톤에 완전히 녹아들었습니다. 이성민과 여란 배우가 등장하는 파트에서는 솔직히 예상보다 훨씬 큰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 배우 모두 코미디 타이밍이 탁월해서, 무거운 영화 안에서 조금은 편하게 숨 쉴 공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약: 이병헌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이 영화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조연 배우들의 코미디 타이밍도 극의 균형을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실 밀착형 공감, 그리고 감정선의 이탈

"종이, 그놈의 종이. 나도 너네 그 잘난 제지 기계랑 똑같아. 방치하면 고장난다고." 이 대사를 들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은 웃음이 아니라 묘한 먹먹함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부품처럼 소모되고 버려지는 구조를 이렇게 단순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꿰뚫는 대사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흔히 '실직' 이라는 주제을 두고, 등장하는 영웅적 해결 방식을 택하지 않습니다. 노조를 결성하거나 기업과 맞서 싸우는 대신, 주인공은 같은 처지의 노동자와 경쟁하고 심지어 제거하려 합니다. 그 비겁한 선택이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관객은 만수를 응원하면서도 마음껏 응원하지 못하는 불편한 감정 사이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만수에게 깊이 이입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희생자인 시조를 살해하는 장면부터 감정이 흔들렸습니다.

시조는 성실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일에 자부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만수가 가장 망설일 것 같은 대상인데, 오히려 가장 가차 없이 제거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만수의 행동에 개연성을 찾아 헤매게 되었고, 이것이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세 명의 경쟁자 중 두 명은 만수가 지원한 포지션에 실제로 경쟁 상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살인의 목적과 결과 사이의 이 논리적 간극이 영화의 유일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요약: 실직이라는 현실적 소재와 블랙유머의 결합은 강렬하지만, 살인이 거듭될수록 주인공 행동의 개연성이 흔들리며 감정 이입이 다소 어려워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여성 캐릭터가 지탱하는 이야기, 그리고 미장센의 완성

겉으로 보면 완전히 남성 중심의 서사입니다. 주요 희생자도, 갈등의 당사자도 남성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가장 오래 남은 캐릭터는 아내 미리(손예진)였습니다. 그가 이 이야기에서 하는 역할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구조적이기 때문입니다.

미리는 만수의 거짓말을 유일하게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덮으면서 가정을 지킵니다. 만수가 취업을 못하자 군말 없이 먼저 생업에 뛰어들고, 불필요한 지출을 스스로 줄이며, 아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수습합니다. 남편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도 결국 여성 캐릭터의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즉 서사의 전면에 서는 주인공은 만수이지만, 이야기를 실제로 버티게 하는 힘은 미리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에게 있습니다.

오프닝과 결말의 대비 역시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오프닝의 행복해 보이는 바베큐 장면은 사실 이미 균열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만수는 술 냄새만 맡고, 아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빠를 지켜보고, 딸은 남의 말을 따라 하는 데 그칩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행복한 가족 장면으로 읽혔는데, 결말을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하면 그 장면 전체가 이미 불안한 행복이었습니다. 집 마당에는 아들의 죄와 만수의 죄가 함께 묻혀 있고, 그 위에는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가 심겨 있습니다. 이 상징적 구성이 압도적으로 촘촘했습니다.

요약: 여성 캐릭터들이 서사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며, 오프닝과 결말의 대비는 영화 전체의 의미를 역방향으로 재구성하게 만드는 정교한 장치다.

 

총평

《어쩔수가없다》는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고, 동시에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통쾌함 대신 씁쓸함이 남고, 웃음 뒤에 서늘함이 따라오는 영화입니다. 만수의 선택에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후 가지게 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극장을 나온 뒤에도 꽤 오래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가 지금만큼의 설득력을 가졌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이병헌의 존재감이 영화의 값어치를 결정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박찬욱 감독 영화가 처음이신 분도, 익숙하신 분도, 일단 극장에서 한 번은 보시길 권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참고: 어쩔수가없다_심층 분석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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