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빈 코스트너
주말 밤에 별 기대 없이 켰다가 생각보다 오래 앉아 있게 된 영화가 있습니다. 2016년 개봉한 <크리미널>이 저한테 딱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케빈 코스트너, 게리 올드만, 토미 리 존스, 라이언 레이놀즈라는 이름들을 포스터에서 발견했을 때, 솔직히 '이 조합이면 못해도 본전은 하겠다'는 계산이 먼저 섰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계산은 반만 맞았는데, 그 이유를 지금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영화의 출발점은 CIA 요원 빌 포스터의 죽음입니다. 테러 조직을 쫓던 그가 임무 중 목숨을 잃으면서, 그의 뇌에 저장된 결정적인 정보도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뇌 과학자 닥터 프락스는 신경 가소성이 유달리 높은 수용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사형을 앞둔 강력범 제리코 스튜어트를 선택합니다. 쉽게 말해, 타인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가장 큰 뇌를 찾은 것입니다.
제가 이 설정에서 멈칫했던 이유는 과학적 타당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흉악범의 머릿속에 국가와 가족을 위해 싸웠던 요원의 기억이 들어간다는 구도 자체가 던지는 질문이 묵직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기억이 이식된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것인가.
케빈 코스트너는 이 혼란을 몸으로 증명해냈습니다. 제리코가 빌의 집 앞에서 이유도 모르고 발걸음을 멈추거나, 아내 질(개스 패도우 분)과 딸을 향해 낯선 보호본능을 느끼며 굳어버리는 장면들은 긴 대사 없이도 인물의 내면 분열을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 눈빛이었습니다. 야수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어딘가 슬프고 낯선 빛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 짧은 찰나 하나가 영화 전체의 감정적 설득력을 떠받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기억 이식 설정과 정체성
영화는 기존의 자아 인식과 새롭게 유입된 정보 사이에서 자기 동일성이 흔들리는 심리 상태인 자아 분열을 뇌 이식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대입해 시각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는 설정 소개가 끝나는 중반부터 힘이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크리미널> 역시 그 패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리코가 기억을 쫓아 은닉처를 찾아가는 시퀀스까지는, 이 설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긴장감의 최대치를 꽤 정직하게 뽑아냈다고 봅니다.
<크리미널>이 단순한 CIA 액션물과 달리 계속 머릿속에 남는 이유는, 영화의 핵심 질문이 꽤 오래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기억이 이식된다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감정도 공감도 없던 범죄자가 '기억'을 통해 사랑과 책임을 배울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뇌신경과학 분야에서도 실제로 논의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제리코가 빌의 가족을 향해 낯선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극단적인 폭력성을 가진 인물이 이식된 감정에 의해 흔들리는 그 모순이, 뇌 속에서 기억과 정체성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오락용 액션 영화에서 이 정도 결의 감정선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완성도
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이 기대는 서서히 무너집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개연성의 급격한 약화입니다. 제리코가 기억의 단서를 따라 움직이는 과정이 초반에는 치밀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이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우연과 편의적 상황 전개에 의존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집니다.
게리 올드만과 토미 리 존스라는 거물들을 캐스팅해 놓고도, 이들 캐릭터의 내면 갈등이나 동기가 충분히 파고들어지지 않은 채 작전 수행이라는 평면적 기능으로만 소비되는 점도 제 경험상 뼈아팠습니다. 제리코의 심리적 변화 역시 속도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 있습니다. 냉혹한 사형수에서 가족을 지키는 존재로의 전환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다 보니, 그 과정에서 마땅히 발생해야 할 감정적 설득력이 붕 뜨고 맙니다.
클라이맥스 액션 시퀀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 핵 통제 시스템을 장악하려는 반정부 테러리스트 더치맨과 헤임달의 계획을 막는 최후의 대결은, 초반의 독창적 서스펜스를 이어받지 못하고 결국 평범한 총격전과 폭발신으로 수렴됩니다. 화려한 재료를 모아놓고 레시피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한 느낌이랄까요. 제 경우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렸으면'이라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습니다.
총평
정리하면, <크리미널>은 2% 부족한 채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신경 가소성과 기억 엔그램이라는 뇌신경과학 개념을 인간 드라마의 연료로 쓴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신선했고, 케빈 코스트너가 그 아이디어를 몸으로 구현하는 방식은 예상보다 훨씬 진지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 플롯 개연성의 붕괴와 조연 배우들의 소모적 활용이 초반의 기대감을 끝까지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완성도'를 기대하고 보면 실망하고, '이 설정에서 이 배우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보면 쏠쏠합니다. 뇌를 끄고 볼 수 있으면서도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 하나를 슬쩍 안겨주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주말 밤 113분을 여기에 써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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